국제

"몇 편 써줬는데"…AI에 밥그릇 뺏긴 케냐 과제 대필 청년

한지훈 기자2026.09.07
"몇 편 써줬는데"…AI에 밥그릇 뺏긴 케냐 과제 대필 청년
나이로비 4만 명 '긱 워커', 챗GPT 등장 이후 급격히 위축 해외 대학생들의 과제를 대신 써주며 생계를 이어온 케냐 청년들이 인공지능(AI)의 공세에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7일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AI 챗봇 서비스가 발전하면서 대필을 맡기지 않고도 손쉽게 에세이를 작성할 수 있게 되자 수천 명의 케냐인이 생계를 의존해온 과제 대필 시장이 급격히 축소되고 있다. 대필 산업이 정점을 찍었던 2020년대 초에는 케냐 수도 나이로비에서만 최소 4만 명이 과제 대행 '긱 워커(초단기 근로자)'로 참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2022년 오픈AI가 챗GPT를 출시한 이후 일감이 줄기 시작했고 단가도 함께 떨어졌다. "공중보건 전공보다 5배 벌었다"…12년간 2500편 쓴 대필업자의 몰락 이 시장의 흥망을 보여주는 인물이 테레시오스 분디다. 케냐 농촌 마을 출신인 그는 2011년 대학 진학을 위해 나이로비로 이주한 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에세이 대필 산업에 발을 들였다. 초기에는 3시간가량 일하고 7달러를 벌었는데, 이는 당시 나이로비 저임금 노동자의 1.5~2일 치 임금과 맞먹는 수준이었다. 그는 이후 12년 동안 2500편이 넘는 에세이를 썼다고 NYT에 밝혔다. 대학에서 공중보건 분야를 전공한 분디는 2015년 졸업 후 아예 온라인 에세이 작성 사업을 시작했다. 온라인 플랫폼으로 과제를 접수받아 고용한 학생들에게 나눠주는 방식으로, 한 편당 40~70달러를 받으며 공중보건 분야에서 벌 수 있었던 돈의 최소 다섯 배를 벌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AI 공세를 끝내 이기지 못한 그는 사업을 접었고, 지금은 독일 정부 산하 개발기관에서 케냐 청년들의 취업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남은 일감은 'AI 냄새 지우기'…부정행위 탐지 피하는 '휴머나이저' 업무로 대필 산업 자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남은 일자리의 성격은 크게 바뀌었다. 현재 남아 있는 일의 상당수는 이른바 '휴머나이저(humanizer)' 업무로, AI가 작성한 논문이나 과제를 부정행위 탐지 소프트웨어에 걸리지 않도록 사람이 손봐주는 작업이다. 즉 직접 글을 쓰는 노동에서, AI가 쓴 글의 흔적을 지우는 노동으로 업의 성격 자체가 바뀐 셈이다. "취업난 탈출구였는데"…청년 실업률 25%, 일자리 80%가 비공식 노동 과제 대필은 명백한 부정행위지만, 케냐 사회에서는 나름 중요한 일자리 역할을 해왔다는 점도 이번 사태를 더욱 무겁게 만든다. 케냐에서는 매년 10만 명 넘는 학생이 대학을 졸업하지만, 이들을 받아줄 양질의 일자리가 턱없이 부족하다. 청년 실업률은 25%가 넘고, 전체 일자리의 약 80%가 배송·건설·노점 판매 등 비공식 노동에 해당한다. 고학력 청년들이 대필 산업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다. 심지어 케냐 정부조차 데이터 입력과 그래픽 디자인, 웹사이트 개발 같은 온라인 아웃소싱 산업을 국가 성장 전략으로 밀어붙이며, 2022년에는 아웃소싱과 온라인 긱 노동을 강조한 10개년 국가 디지털 마스터플랜을 채택하기도 했다. 받아쓰기·데이터라벨링·콘텐츠 검수까지…AI가 잠식하는 온라인 노동 AI의 영향은 과제 대필에만 그치지 않는다. 케냐 청년들이 주로 맡아온 받아쓰기와 데이터 라벨링, 소셜미디어(SNS) 콘텐츠 검수 등 다른 온라인 노동 일자리도 함께 줄고 있다. AI가 이런 온라인 프리랜서 업무를 대체하는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는 추세다. 스케일AI와 AI안전센터가 진행한 평가에 따르면, 주요 AI 모델이 온라인 프리랜서 업무를 완료한 비율은 지난해 10월 2.5%에서 지난 7월 16%로 6배 넘게 뛰었다. 글로벌 아웃소싱 성장 전략 자체가 흔들려 이번 사태는 케냐 정부가 오랫동안 추진해온 국가 성장 전략 자체를 뒤흔들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여진다. 저임금 지식노동을 글로벌 아웃소싱 시장에 공급해 성장하겠다는 전략이 AI라는 예상치 못한 변수에 정면으로 부딪힌 셈이다. 케냐뿐 아니라 필리핀, 인도 등 비슷한 아웃소싱 경제 모델을 가진 개발도상국들도 앞으로 유사한 충격을 받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AI가 대체한 자리를 어떤 새로운 일자리로 채울지 AI 대체 속도가 지난 1년 사이 6배 넘게 빨라진 만큼, 케냐를 비롯한 개발도상국의 온라인 노동 시장은 앞으로 더 가파른 변화를 겪을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이런 청년들을 흡수할 만한 대안적 일자리가 아직 뚜렷하지 않다는 점이다. 분디처럼 개발기구를 통해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는 사례가 늘고 있지만, 이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AI가 만들어낸 노동시장의 공백을 각국 정부와 국제기구가 어떤 방식으로 메워나갈 수 있을지가, 향후 개발도상국 청년 고용 정책의 과제로 떠오를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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