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 배송 업무인 줄"…검사 사칭 보이스피싱 수거책, 실형
한지훈 기자2026.09.24

피해자 32명서 12억 원 넘게 뜯어…"명의 도용" 협박에 현금·골드바까지
검사와 수사관, 금융감독원 직원을 사칭해 피해자들의 금품을 가로챈 보이스피싱 조직의 현금 수거·전달책들에게 법원이 실형을 선고했다.
이 조직은 피해자들에게 "명의가 범죄에 연루됐다", "증거금이 필요하다", "기존 대출금을 상환해야 저금리 대환대출이 가능하다"는 식으로 속여 현금과 골드바를 가로챘다.
재판에 넘겨진 A씨는 피해자 12명으로부터 약 3억7100만 원의 금품을 수거했고, B씨는 피해자 17명의 6억 원이 넘는 범죄수익을 가상화폐로 환전해 조직에 전달하는 데 관여했다.
C씨는 피해자 3명으로부터 2억 원이 넘는 현금을 받아 조직에 전달한 혐의로 유죄가 인정됐다.
세 사람이 관여한 피해 금액만 합쳐도 12억 원을 훌쩍 넘는다.
"고액 알바인 줄 알았다"…재판부, 이들의 항변 전부 배척
이들 모두 공통적으로 내세운 방어 논리는 "정상적인 아르바이트인 줄 알았을 뿐, 보이스피싱 범행인 줄은 몰랐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재판을 맡은 최 부장판사는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짧은 기간 동안 거액의 현금이나 골드바를 건네받아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업무가 정상적인 물류·배송 업무일 수 없다는 점에서, 최소한 범죄에 이용될 가능성을 인식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었다.
'몰랐다' 통하던 시대는 지났다…대법원도 "전달책 없이는 범행 완성 안 돼"
이번 판결은 최근 사법부 전반의 흐름과도 맥을 같이한다.
보이스피싱은 총책과 콜센터, 인출책, 전달책으로 역할이 나뉘는 전형적인 조직범죄인데, 전달책은 피해자의 돈이 범죄조직으로 최종 넘어가는 '마지막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법원은 이 역할이 없으면 범행 자체가 완성될 수 없다고 본다.
실제로 대법원은 2025년 판결에서 전달책의 역할이 범행 완성에 필수적이라는 점을 거듭 확인한 바 있다.
법조계에서는 "단순 심부름이었다"는 변명이 통하던 시대는 지났다는 평가가 나온다.
최근 법원은 전달책을 사기방조범을 넘어 사기죄의 공동정범으로 보는 비율을 점차 높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판단 기준은 '주관적 인식'보다 '객관적 의심 정황'
법조계에 따르면 법원이 가담 여부를 판단할 때 중요하게 보는 것은 피고인이 실제로 범죄임을 알았는지 여부(주관적 인식)가 아니라, 당시 상황에서 객관적으로 의심할 만한 정황이 있었는지다.
비정상적인 채용 경위나 위조 문서 사용 등이 겹친 경우에는 고의가 인정되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로 대법원은 지난 1월 23일 이런 취지의 판결을 내놓은 바 있다.
반대로 정상적인 채용 절차를 거쳤고 평범한 업무처럼 보였던 경우라면 고의가 부정되기도 하는 등, 사건마다 정황에 따라 결론이 크게 갈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생계형이면 집행유예도"…AI 돈다발 사진에 속은 외국인 사례
다만 모든 전달책이 실형을 받는 것은 아니다.
지난 5일 서울서부지법 형사1단독 박지원 부장판사는 인공지능(AI)이 생성한 가짜 돈다발 사진에 속아 현장에서 체포된 카자흐스탄 국적 20대 남성 투자리딩방 사기 전달책에게 전기통신금융사기피해방지법 위반 등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조직적 사기 범행에 가담했으나 생계형 범죄로 보이고 미수에 그쳤다"며 "이 사건으로 2개월가량 구금돼 있던 점 등을 참작했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합의·공탁하면 감형도…"진심 어린 반성 태도"가 관건
실제로 항소심에서 형량이 크게 줄어든 사례도 있다.
보이스피싱 조직의 지시에 따라 현금수거책으로부터 총 1억1710만 원을 건네받아 조직에 전달하고, 850만 원을 추가로 전달하려다 현장에서 체포된 한 피고인은 1심에서 일부 혐의를 부인했지만, 항소심에서는 범행을 모두 인정하고 진심으로 반성하는 태도를 보였다.
여기에 피해자들과의 합의를 시도하고 피해 금액 일부를 법원에 공탁해 피해 회복 의사를 보인 점이 인정되면서, 최종 형량이 감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조직적 사기 범죄의 사회적 해악이 크다고 보는 법원의 기본 입장에도 불구하고, 피해 회복을 위한 진정성 있는 노력이 양형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접근매체 넘기면 별도 처벌…통장·OTP 양도만으로도 최대 징역 5년
통장이나 체크카드, OTP(일회용 비밀번호 생성기), 계좌번호 등 이른바 '접근매체'를 넘긴 경우에는 전자금융거래법 위반이 별도로 적용될 수 있다.
이 법은 접근매체 양도를 금지하고 있으며, 위반 시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대가 없이 일시적으로 빌려준 것에 그친다면 '양도'에 해당하지 않을 여지가 있지만, 대가를 받거나 범죄에 쓰일 것을 알면서 넘겼다면 처벌 대상이 되며, 그 통장이 실제 보이스피싱에 쓰였다면 사기방조 혐의까지 추가될 수 있다.
"고액 알바 광고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을 얼마나 높일지"
법조계 전문가들은 최근 법원의 판결 경향이 "몰랐다"는 항변만으로는 처벌을 피하기 어려운 쪽으로 확실히 기울고 있다고 본다.
짧은 시간에 거액의 현금이나 골드바, 가상화폐를 전달하는 대가로 고액을 제시하는 아르바이트라면, 그 자체로 이미 '의심할 만한 정황'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최근 판례의 일관된 흐름이다.
구직 과정에서 일반적인 업무 상식에서 벗어난 조건을 제시받았을 때, 이를 얼마나 예민하게 의심하고 걸러내느냐가 보이스피싱 조직의 말단 가담자로 전락하는 것을 막는 방법이다.
법무부와 경찰 등 수사당국은 이런 고액 아르바이트를 가장한 보이스피싱 가담 유인 광고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을 높이기 위한 홍보를 이어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