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림 2억6천만 명 시대…기후·전쟁 겹친 '애그플레이션'
정하윤 기자2026.08.28

FAO 2026년 식량물가 3.2%↑ 전망…국가별 격차는 '극과 극'
전 세계 식량 시장에 다시 인플레이션 경고등이 켜졌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는 2026년 세계 식량 물가 상승률이 평균 3.2%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면서도, 160개국에 걸쳐 국가별·지역별 격차가 매우 크다는 점을 강조했다.
평균치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일부 취약국가에서는 두 자릿수 물가 상승률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경고다.
올해 1월 국제 곡물 시장을 보면 옥수수는 공급량 증가로 대체로 안정세를 보인 반면, 밀은 흑해 수출 흐름에 대한 우려와 러시아의 파종 감소 예상 등으로 상승세를 탔다.
쌀 역시 향미 품종 수요 증가로 오름세를 보였고, 파키스탄은 2025년 말 발생한 홍수·산사태 여파로 밀 가격 상승이 계속되고 있다.
굶주림 인구 10년 새 두 배로…가자·수단선 이미 '기근' 확인
문제는 이런 가격 상승이 통계상 숫자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FAO와 세계식량계획(WFP), 글로벌 식량위기 대응 네트워크가 공동 발간한 '2026 세계 식량위기 보고서(GRFC)'에 따르면, 지난해 47개국 약 2억6600만 명이 심각한 식량 불안정이나 기근 상황에 놓여 인도적 지원이 시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분석 대상 인구의 22.9%에 해당하는 규모로, 2020년 이후 줄곧 20%를 웃도는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이번 보고서는 10번째 발간을 맞아 심각한 굶주림이 지난 10년간 두 배로 늘었으며, 지난해에는 사상 최초로 두 곳(가자지구, 수단)에서 동시에 기근이 선포됐다고 밝혔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보고서 서문에서 굶주림 종식은 인류 공동의 도덕성을 시험하는 문제이며 실패해서는 안 되는 시험이라고 밝혔다.
특히 이 보고서는 굶주림이 점점 더 '전쟁의 무기'로 활용되고 있다는 우려스러운 현실을 지적했다.
이란 전쟁이 촉발한 '비료 위기'…걸프산 요소 30% 이상 차단
지정학적 갈등도 식량 위기를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국제에너지기구(IEA)의 '2026 세계 에너지 투자'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무력 충돌로 촉발된 호르무즈 해협 봉쇄 사태는 에너지 안보를 넘어 식량 생산 기반까지 흔들고 있다.
전 세계 요소(비료 원료) 생산의 30% 이상이 걸프 국가에서 이 해협을 거쳐 수출되는데, 파티 비롤 IEA 사무총장이 "인류가 겪은 가장 큰 에너지 안보 위기"라고 평가할 정도로 물류 차질이 커지면서, 천연가스를 원료로 하는 비료 가격 상승이 곡물 생산비 상승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제기된다.
실제로 이번 사태로 천연가스 투자는 10년 만에 최고 수준(3300억 달러)으로 늘었지만, 정작 공급 자체는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다.
히트플레이션까지 가세…"기후가 전쟁보다 더 큰 변수 될 수도"
여기에 전 세계를 강타한 기록적 폭염과 가뭄까지 겹쳐 식량 공급을 압박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폭염 이후 닭 약 300만 마리가 폐사하고 우유 생산량이 30% 줄었으며, 유럽 전역의 채소 농가도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영국 경제분석기관 옥스퍼드 이코노믹스는 폭염이 향후 식품 가격 상승의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으며, 장기적으로는 전쟁 같은 지정학적 요인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한 바 있다.
미국에서는 낮은 작물 가격과 높은 생산 비용으로 농부들이 재배 전략을 조정하며 콩 재배 면적을 늘릴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는 다시 글로벌 곡물 공급 구조에 새로운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韓, 식량 수입 의존도 높아 "직격탄" 우려
이런 국제 곡물가 흐름은 식량 수입 의존도가 높은 한국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국제 쌀 가격 상승은 국내 쌀 수입 비용 증가로, 밀 가격 상승은 밀가루 제품 가격 상승으로 곧바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미 국내에서는 지난달 폭염 영향으로 시금치 가격이 한 달 새 152% 폭등하는 등 '히트플레이션'이 밥상 물가를 직격한 바 있어, 국제 곡물가 상승까지 겹칠 경우 국내 식품 물가에 이중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농업 관련 기관들 사이에서는 농가가 급격한 가격 변동에 대처할 수 있도록 보험 제도나 정부 보조금 확대가 절실하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20년 전 '식량 무기화'의 그림자…"이번엔 전쟁이 아닌 기후·전쟁 복합판"
과거 사례를 돌아보면 이런 애그플레이션 우려가 처음은 아니다.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서방 제재에 맞서 밀·호밀·보리·옥수수 등 곡물 수출을 금지하면서, 세계식량가격지수가 1996년 통계 집계 이래 최고치를 기록한 바 있다.
당시에는 특정 국가의 수출 금지 조치가 위기의 직접적 방아쇠였다면, 2026년 현재는 중동 무력 충돌에 따른 비료·에너지 공급망 차질과 기후변화에 따른 이상기후가 동시에 작용하는 '복합 위기' 양상이라는 점에서 대응 난이도가 한층 높아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질적 대응은 요원…인도적 지원과 농업 정책 병행 시급
전문가들은 이번 위기가 지정학·기후·경제 요인이 얽힌 문제인 만큼, 단기 처방만으로는 해결이 어렵다고 지적한다.
유엔은 인도적 지원 확대와 함께 각국의 농업 생산 기반 강화를 촉구하고 있지만, 재원 확보와 국제 공조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실효성 있는 대응이 쉽지 않다는 우려도 나온다.
국내적으로도 장기적이고 지속가능한 농업 정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이란을 둘러싼 지정학적 긴장이 완화되지 않는 한 국제 식량 시장의 불안정성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